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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요미모노> 2016년 1월호에 실렸던 에세이입니다.


편애독서관


「히구치 이치요를 살았던 날들」

후쿠다 마유코



 1년 전 어느 연극 워크숍에 참가했다. 워크숍 과제는, 실재하는, 혹은 실재했던 인물을 철저히 조사하여 그 인물이 혼자서 지내는 시간을 워크숍 내에서 연기하는 것이었다. 각본, 연출, 배우를 모두 혼자 맡으며, 한 씬을 만들어내며, 선택할 수 있는 인물에는 제한이 없었다. 내가 바로 떠올린 사람은 히구치 이치요였다.


 중학생 무렵 『키재기』를 읽고, 히구치 이치요의 매력에 끌렸다. 여자이면서, 아이이면서, 가난뱅이인. 그런 약자 입장인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다리로 버티어내며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사람의 강함과 약함의 양면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려낸 이치요의 작품이 나는 좋았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가장으로 여성이 문학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시대에, 자신의 강한 신념으로 문학의 길에 뜻을 두었던 이치요. 그녀를 연기해보고 싶다. 나는 곧바로 결정했다.


 이치요 본인에 대해 아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그녀의 일기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이치요 일기를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읽은 『히구치 이치요 일기』는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고, 일기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이 정리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분량이었다. 가사를 도우면서 ‘하기노샤’라는 가숙歌塾에서 와카(和歌,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나 문학을 배우기 시작한 14살 무렵부터, 24살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의 그녀의 다양한 생각들이 담겨있다.


 이치요가 17살이었을 무렵, 아버지 노리요시가 사업실패로 인한 빚을 남긴 채 사망하게 된다. 그렇게 이치요는 어머니 타키, 여동생 쿠니와 셋이서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재봉 일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도 그녀는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 집필을 이어나간다. 이치요는 항상 빚에 허덕이는 잔혹한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이겨내며, 죽기 반년 전에는 모리 오가이(森鴎外), 코다 로한(幸田露伴)에게 격찬받을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치요는 그것에 기뻐하는 한편으론, 이치요가 희귀한 여자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생각도 일기에 쓰여 있었다. 이치요는 유명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순수하게 문학을 사랑했었다. 유명해지고도 인기 있는 것을 단순히 기뻐할 수 없는 이치요가, 나는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그렇게 진지하고 거짓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삶의 고달픔을 계속 느꼈던 것이다.


 일기는 이치요가 죽기 4개월 전에 끝나는데, 그 뒤로는 집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진행되었다는 듯하다. 일기에는 결핵에 대해서 아주 조금밖에 쓰여있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 일기에도 그런 시기이니 분명 몸 상태도 상당히 안 좋고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을 테지만 그런 건 전혀 쓰여있지 않았다. 그녀는 결핵에 대해, 자신이 곧 죽는 것에 대해, 일기에서조차 쓸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든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고, 강한 마음으로 있고 싶은 이상이 있어서, 다들 혼자서 그런 것들과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다. 나는 이치요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그녀의 불안이나 공포, 어찌할 수 없는 쓸쓸함이 가득 차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


 일기를 다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이치요 작품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제대로 전해졌을지였다. 세상에 유행하는 것에 대한 중심 없는 목소리도 많이 들렸을지 모르지만 이치요의 작품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을 터. 만약 그 사람들을 알지 못한 채로 그녀가 죽었다면, 그건 정말 슬프다. 동시에 내가 이렇게 그녀의 작품을 몇 년이고 소중히 읽어나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거란 것도 매우 분했다. 제멋대로고 자기만족이지만 그녀를 연기함으로써 무언가가 그녀에게 전해지는 게 아닐까. 본인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연기하자. 그렇게 생각하여 씬을 생각하고, 몇 번이고 연습했다.


 내가 어떤 씬을 연기하였는지는 비밀에 부쳐두고 싶다. 개인적이고 쑥스러운 연습 장소에서의 일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여러분 앞에서 히구치 이치요를 연기해보고 싶다. 이치요를 연기하는 것. 그건 나의 큰 꿈 중 하나가 되었다. 약해질 거 같을 때, 자신을 소설을 쓰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이치요와, 그런 이치요를 생각하며 열심히 연기했던 나를 떠올리면 다시 한 번 반듯하게 일어설 수 있다. 많은 작품에서 만난 역할들처럼, 이치요는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함께 싸워주고 있다.



※ 『히구치 이치요 일기』는 국내에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북스토리)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품절되어 이북으로만 구매할 수 있는 듯 하다.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북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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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재기 외』 (을유문화사)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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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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